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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잇 스탠드 1997 불안과 혼돈의 하룻밤영화 추천/영화 2012. 12. 25. 10:23
마이클 피기스 감독의 원나잇 스탠드. 흑백 커플과 원나잇,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19금 불륜 영화로 단순하게 포장 되어있다. 이뿐인가. 동성애자도 나오니 가족영화 착한 영화로 분류하기에 다분히 무리스럽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목만 저런 것이 아니었더라도 관객들의 클리쉐를 조금 해체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왜 자기 작품을 뻔한 불륜영화로 홍보하도록 빌미를 제공하냔 말이다. 영화 원나잇 스탠드는 남녀간의 로맨스 보다 개인에게 닥친 죽음의 공포이고 위선과 가식이 가져다준 불안과 혼돈이다. 불륜 영화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면 말도 안 되고 지루한 그리고 찜찜하기만 할 것이다. 어린애들은 안보면 좋겠다.
영화가 시작하면 주인공 맥스(웨슬리 스나입스)가 뉴욕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시내를 나오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할 정도로 당차다. 자신은 서른 다섯 살이고 광고쟁이인데 유럽에서 주는 상을 받을 만큼 성공했고 아름다운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는 행복한 유부남이라고. LA에 살며 광고 기획차 5년만에 뉴욕을 왔고 온 김에 절친을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친구라... 뉴욕에서 같이 살던 찰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무용수로 게이다. 5년 전에 큰 싸움을 벌인 후 헤어져 연락도 안하고 살다가 그가 HIV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은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호박씨까냐? 아직도 내숭이냐고.
숨기고 다녀? 호모한테 관심 있으니까 나랑 붙어다닌거 아니냐고?
절대로 절대로 아니야. 난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좋다고.
그렇게 과잉방어 하지마. 호모 혐오증으로 보여.
무슨 방어를 했다고 그래?
맥스와 찰리의 5년만의 재회 장면은 앞서 말한 “찰리는 게이지만 저는 아니에요. 찰리만 게이라구요.”했던 맥스의 말이 자꾸 떠오를 만큼 아리송하다. 5년 만에 맥스를 만난 찰리는 섭섭함을 감추지 않고 데면데면 한다. 맥스가 아들의 이름을 찰리로 지었다고 알려주니 그제야 미소짓는 찰리다.
맥스는 뉴욕 호텔로비에서 광고 기획을 하는데 어떤 여자하고 자꾸 눈이 마주친다. 여기서부터 맥스가 LA행 비행기를 타는 약 20분 동안 정말 빼어난 감각으로 남녀의 만남을 포착한다. 하룻 밤의 일을 느리고 길게 넣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액자식 구성의 단편과도 같아 보인다. 알쏭달쏭한 끌림이나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우연의 연속, 그리고 노곤한 재즈 선율. 이렇다 할 끌림의 이유도 없이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끝나버린 관계. 그들은 줄리어드 현악 4중주 음악회를 같이 봤고 뉴욕의 밤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싱글 투 베드 룸에서 잠을 청한다.
LA에 돌아온 맥스에게는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계속된다. 부인의 보챔에 아무 불평 안 하기, 피클 광고주의 말도 안 되는 피클 우월주의 들어주기, 광고 모델들의 감정기복 맞춰 주기. 그는 광고 촬영 후 파티에서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 분위기를 다운시키고 남자와 키스 해봤냐는 동료의 비아냥에 ‘해봤다’라고 까지 이야기 한다.
다음해는 무척 힘들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해 가는데 나는 지켜볼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 자신을 볼 수 있고 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모든 것에서 제외된 느낌.
아내를 사랑했고 아이들을 귀여워 했지만 난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그는 일 년 뒤 뉴욕을 다시 방문한다. 찰리의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실에서 찰리의 인공호흡기 낀 모습에 숨을 멈추고 병문안을 하는 형이 낀 위생용 장갑에 흠짓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괜찮아 보이지 않는 찰리. 그의 병실에 한 여자가 들어오고 일 년전에 하룻 밤을 보낸 카렌이 찰리 형의 부인인 걸 알게 된다. 맥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지만 새벽 찰리의 병실에서 키스를 하고 찰리가 그 장면을 보게 되면서 맥스는 찰리에게 그 비밀스러웠던 하룻밤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찰리는 나도 모른다며 네가 해결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
너와 한동안 안좋았던거 시간낭비였어.
내 잘못이야. 내가 질투가 났었어. 무서운 감정이지.
난 그때... 네가 날 데리고 가지 않아서 너한테 화가 났었어.
어쩔 수가 없었어 방법을 몰랐거든
알아 이젠 감정의 찌꺼기 같은 건 없어졌으면 좋겠어.
죽음은 나보다 너희에게 더 힘들 것 같아.
죽음 앞둔 사랑하는 친구의 두려움과 혼돈을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는 맥스. 그냥 불륜 영화로 보면 이런 장면 같은 건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카렌이라는 여자는 이 영화에서 속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데 단지 맥스의 자아 같기도 하다. 운전 중에도 흡연은 자살이라고 중얼거리고 주변에서 담배를 못 피게 하면 한 마디도 못하고 그만 두고 마는 맥스지만 카렌은 줄담배를 피운다. 줄리어드 현악 4중주와 니나 시몬의 음악을 동시에 좋아하고 무엇보다 맥스를 거부하지 않는 여자. 죽어가는 찰리 앞에서 찰리의 형보다 더 눈물을 보이고 찰리가 죽은 후에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지치는 사람이니까. 맥스는 찰리의 죽음 뒤 카렌에게 적극적으로 대하고 결말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끝난다. 맥스와 카렌은 그렇다 쳐도 미미하고 보닌은 뭔가. 그 둘도 어울린다.
P.S
영화 엔딩 크레딧에
This film dedicated to the memory of Steven Whitson
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웨슬리 스나입스가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촬영 감독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매우 매우 잘생겨 보이게 잡아주었으니까. 완전 다른 배우같다. 그는 연기를 참 잘한다.
뉴욕이라는 공간을 감독이 어떤 시선으로 잡았는지 지켜볼만 하다. 마이클 피기스가 바라보는 뉴욕은 무국적의 남자가 딱 하룻밤만 지내기 좋은 곳으로 잡은 것 같다. 멋지다.
음악 좋다. 다음은 트랙 리스트
CD 1
01. One Night Stand
02. Angels #2
03. Max And Karen
04. The Organ Grinder's Swing (Performed By Jimmy Smith)
05. Liberty
06. Exactly Like You (Performed By Nina Simone)
07. The Mugging
08. I'd Like You To Stay
09. Air On A G String (Performed By Jacques Loussier)
10. San Vicente
11. A Question For Charles?
12. Heart Noir
13. Life Is An Orange
14. Maxwerk
15. Graveyard Shift
16. Karen And Max
17. Angels #3
18. Cavatina (Performed By The Juilliard String Quartet)